소설집 한 권을 엮는 데 차일피일 하다가 장장 40년이 걸렸다.
약관의 20대에 재학 중 일간지(73년 /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교적 화려(?)한 등단을 함으로써, 당시 한동안은 '나 혼자'만이 제법 거들먹거리기도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글쟁이'로서의 그 맥을 이어가지 못한 채 그냥 그렇게 세월만 보내고 말았다. 하지만 우습게도 한 순간도 '뭔가 써야지'하는 생각만은 놓친 적이 없었다.
변명같지만, 졸업 후 제법 알찼던 종합지를 시발로 모모한 몇몇 큰 회사를 전전하면서 어느 때는 열사의 모래땅에서, 또 어느 해는 빛도 들지 않는 미지의 밀림에서, 그리고 틈새틈새 선진 문명이 현란하던 여러 나라 여러 도시를 누비며, 혹여 내 욕망의 사고가 침전될까 나름대로 나를 채찍질하곤 했었다. 그러면서 그때그때 끄적였던 짤막한 메모들은 언젠가는 내 술 도가니 속 용수에 걸러진 젖먹이가 될 것이라고 독백하며 혼자만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남사당처럼 여기저기를 흘러다니다 결국 아메리카에 정착하면서 그냥, 곧 '뭔가'가 이루어지면 그때부터 하고 싶은 모든 일들을 시작할 것이라고…. 약간의 조바심은 있었지만 우정 서두름은 접어둔 채 건방지게도 나만의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쩌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고 아차 하며 내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다가 깜짝 깨달았다.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이 얼마나 황당하고 허망한 것이었는지,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절감하며 결과적으로 내가 살아온 인생은 '실패한 삶'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더구나 연륜이 60을 지나 그 중반을 넘어서자 이제사 공연히 여생이 초조해지며 뭐든 서둘러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굴뚝처럼 일었다.
뭐부터 먼저 정리를 해야 하나? 밤잠을 설치며 연구(?)를 해보았지만, 혹 나 떠난 다음에 남겨진 가족들이나 특히 손주 녀석들에게 훗날 할애비의 흔적을 좀이나마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남겨진 재물도 없었고 물려줄 가보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끄적여 놓았던 내가 생산한 흔적들을 긁어모아 묶어놓는 작업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래서 뒤늦게 지난날의 흔적들을 찾는 작업을 시작했고, 다행히 오랜 벗인 백白군이 이것저것 자기 일 마다하고 그나마 틈틈이 거들어 주어서 그런대로 '단편집' 한 권을 엮었다.
이제사 얼굴을 내민 단편집『베니스 갈매기』는 단편 10편으로 엮어졌다. 신춘문예 수상작과 해외동포문학상 수상 단편도 있고 월남 얘기, 중동 얘기, 이민사회 얘기들과 그야말로 몇 십년 전의 구닥다리 소설들도 빼곰이 얼굴을 내밀고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얘기들이 문학성이 있나 없나를 떠나 그래도 지금까지 남의 집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놈들을 비로소 찾아내어 새로 지은 나의 글집 속에로 함께 돌아와 있다는 것에 나는 감히 그 의미를 부여코자 한다. 뒤늦게 던져지는 이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읽히고 말고는 그 다음이 될 것이다 아쉽다면 내가 나름대로 유념했던 지난 날 웨스트 파푸아 뉴기니아에서의 ‘밀림 얘기’가 여기에서 빠진 것인데, 이 놈은 근간에 전작장편으로 내 마지막 흔적으로 정리할 생긱이다.
― 손용상, <책머리에 부쳐> 중에서

손용상은 1973년 단편 <방생>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 작가다. 그는 데뷔 이후 <승, 묵상기> <대기소대의 주말> <반주께미> <어둠 속으로> 등 4, 5편의 단편을 간간이 발표했을 뿐 지속적인 창작 활동을 보여주지 못한 채 창작 외적인 직장인으로써 살아가고 있다가 80년대 들어 소설문학을 통해 몇 개의 신작 단편을 선보였다.
그의 데뷔 무렵의 작품과 이제 새로 보게 되는 신작 사이에는 10년의 상거가 있다. 따라서 작품이나 작가 의식에 얼마만큼의 변모가 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과면 데뷔 무렵의 작품인 <방생>이나 <승, 묵상기>와 신작인 <동 트는 새벽꿈에>와 <수험 준비생> 사이에는 여러 면에서 참으로 현격한 차이가 찾아진다. 앞의 작품들이 영혼의 구원, 혹은 불교적인 구도와 업고의 문제에 집착하는 엄숙성과 함께 다분히 관념적인 경험을 보이는 데 반하여 뒤의 작품들은 이런 것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가볍게 삶의 한 단면을 제시하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러한 차이는 양자가 대극을 이룬다고 하여도 좋을 만큼 여러 면에서 상반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문제는 이런 변모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그것이 이 작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 이래수(문학평론가), 손용상작품론 <엄숙성의 변증법> (《소설문학》손용상 특집호 중)


- 차 례 -

□ 책 머리에
□ 베니스 갈매기
□ 삼베수건의 비밀
□ 대기소대의 주말
□ 방생
□ 반주께미
□ 승, 묵상기
□ 어둠의 벽
□ 수험 준비생
□ 동 트는 새벽꿈에
□ '딱지'를 위하여

□ 손용상론 | 엄숙성의 변증법_이래수

[2012.06.10 초판발행. 244페이지. 정가 1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