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준경의 단평 -이건청 이재무 김관식 정은영 유병욱
겨울 나무 / 이건청
이제 서리오고
얼음 오면
가랑잎 세상 덮으리니
그때, 넉넉히 쉬렴
뿌리 쪽으로 가
잠도 자렴
눈도 귀도 닫고 쉬렴
겨울은 농한기라고 해서 예전에 우리 농촌에서는 사철 중 가장 여유 있는 시기였으니 비로소 사랑채에 모여 새끼를 꼬거나 화투놀이를 하며 이웃이 모일 수 있는 시기였다.
우리네 인생 또한 어떠한가. 봄 여름 가을 쉼 없이 씨 뿌리고 가꾸며 거둬들였거니 이제 비로소 노년을 맞아 오라는 곳도 줄어들고 나갈 일도 적으니 그야말로 인생의 한가로운 때를 맞이하였다.
시인은 그동안 잘 가꾸고 견뎌온 자신의 노고를 치하하며 자신을 겨울나무에 빗대어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이제 몸도 마음도 편히 쉬라고 말해주고 있다.
‘뿌리 쪽으로 가/ 잠도 자렴’은 무슨 뜻일까? 뿌리 쪽에는 흙이 있고 거기서 잠든다면?
언뜻 시인의 회한이 내게로 옮아온다.
유한한 우리네 인생, 겨울나무의 때가 온 것이다.
‘겨우내 맨발로/ 네 곁에 서 있을게’
남은 생을 잘 지켜야겠다는 자신을 향한 위로의 말이 가슴 뭉클하다.
개심사 / 이재무
개심사를 찾았네
마음 열기 전 마음 고쳐야 한다
배롱나무 가지 열고 나온
꽃, 마음을 전해주었네
네모난 주춧돌 위에 세워진
둥근 기둥과
사각의 기와로 이루어진
지붕의 능선을 바라보다가
해우소에 들러 근심 한 덩어리
떨어뜨리고 일주문을 나섰네
改心에서 開心까지
수만 리 길 아득하였네
다시올문학 49
2021 가을호
개심사는 우리나라에 여러 곳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모두 개심사改心寺는 아니고 개심開心寺로 알고 있다. 개심開心은 마음을 열라는 뜻이며 동시에 마음을 열어준다는 뜻도 될 것이다.
그런데 시인은 개심사에 가서 마음을 열기 전에 우선 마음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한다.
선민들이 교회나 절을 찾는 종교적 행위는 무언가 위로 받고 싶거나 또는 간절히 소원하는 것을 빌고 싶은 마음에서다.
시인에게도 나름의 풀고 싶은 개심開心, 혹은 개심改心 거리가 있었을까? 근심 한 덩어리 떨어뜨렸다는 시구가 육감적으로 다가온다.
마음을 고치는 일이나 마음을 여는 일이나 누구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일이니,
수만리 길, 아득할 수밖에.
메타버스* 1 / 김관식
이제, 메타버스와 함께
지금을 벗어나
아빠도 엄마도 모르는 곳
제페토**를 만나면
현실이 아닌 가상 세계
또 다른 나,
욕망이라는 아바타....
낯선 곳이 어리버리해도
순간 이동이 꿈같이
제페토, 모든 걸 잊게 해줘!
우리, 아바타로 같이 살아
어서 메타버스로
* Metaverse
** ZEPETO
시의 끝에서 시인은 ‘어서 메타버스로’ 라고 종용하고 있다.
메타버스(Metaverse)는 메타(Meta)와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가상공간 안에서 전 세계 누구든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게임과 춤을 즐기며 경제 활동까지를 가능케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150여 년 전에 영국의 수학자이자 작가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루이스 캐럴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를 흥미롭게 읽은 일이 있다. 황당무계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이 동화의 내용은 앨리스라는 소녀의 꿈 이야기지만 오늘날 바로 그 꿈같은 일들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메타버스의 네이버 글로벌 가입자 수는 약 2억 2천명을 넘었고 세계 앱스토어 중 1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90%가 외국인 가입자이고 그 중 80%가 10대들이라고 한다.
이미 기업들은 이 가상공간에 합류하여 아바타를 통해서 전 세계를 향한 홍보에 나서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제페토를 활용하는 사업이 늘어나 소비생활에 까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사실을 직시한 시인은 어서 우리도 현실에만 매달리지 말고 나의 아바타를 만들어 순간이동이 꿈같은 가상공간으로 들어가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겐 낯선 단어들이다.
배롱 꽃 필 무렵 / 정은영
통곡을 해라
살다 보면 한 번쯤은
맘껏 울어도 된다
참다 참다 터지면
그때는 남김없이 울어야 한다
한 번은 꼭, 한번은
밤낮으로 한 달 내내
다시는 눈물이 얼씬도 못하게 울어라
그리하여 다시는
다시는 눈물이 차오르지 않도록
한 방울도 남김없이 울어야 한다
돌아서 울먹이다가도
구름이 밀려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웃는 하늘아
배롱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이라고 한다. 7월에서 9월에 이르기까지 100일 이상을 오래 피기 때문에 백일홍이라 부르는가 하면 자미화紫微花라고도 하고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꽃은 분홍 보라 흰색 등 오골오골 주름진 꽃잎이 초록의 잎들과 어울려 탐스럽고 운치 있다.
이 새아씨처럼 예쁜 배롱꽃 필 무렵을 시인은 ‘통곡을 해라’ ‘맘껏 울어도 된다’ ‘다시는 눈물이 차오르지 않도록/ 한 방울도 남김없이 울어야 한다’고 꽃과는 상반된 이미지를 불러들이고 있다. 폭죽처럼 터져나오는 꽃망울이 참을 수 없는 눈물로 연상 되었음일까.
몇 해 전 배롱꽃이 막 피기 시작할 때, 담양 명옥헌에 간 일이 있다. 어쩌다 마음이 아플 때는 용기인지 오기인지 홀로 여행을 떠난다. 마침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다. 명옥헌 연못가로 둘러선 배롱나무 밑을 거닐며 나는 남몰래 많이 울었다. 안타까운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 눈물 지금은 어떻게 말랐을까?
어쩌면 이 시인도 배롱꽃 필 무렵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었거나 뜻밖의 슬픔을 맞은 것은 아닐까.
배롱꽃 지는 소리가 후둑후둑 여인의 굵은 눈물방울 같다.
드라이브 / 유병욱
책을 읽고 있어
가속 페달을 밟으며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있어
그 사람도 책을 읽고 있어
빌딩이 지나가고
다리의 난간이 지나가고
어디쯤 읽었을까
옆에 앉은 사람이 읽는 책과 내가 읽는 책이 닮았다
멀리서는 똑같은 책이었는데
가까이서는 다른 책을 펼치고 있다
바람이 차창에 부딪히고
울퉁불퉁한 길이 책장을 조금씩 흔든다
어디 쯤 읽었을까
산 안쪽의 도로가 유선형으로 휘어가고
목적지에 도착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각자의 책을 다 읽으려고
산 안쪽의 색과 소리에 집중하고
책은 다 읽지 못하고
옆에 앉은 사람과 책을 바꾸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첫 장을 펼쳐 읽으며
두 사람은 도시를 떠나 먼 어느 지방으로 여행을 가고 있다. 시외버스를 탄 것도 같고 화자가 운전을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책을 읽다니?
서로는 아마도 잘 모르는 사이이거나 처음 만난 사이인 듯.
서로에 대한 탐색을 시인은 책을 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둘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지만 어떻게 짧은 여행 중에 서로를 다 읽을 수 있겠는가?
바람이 불고 울퉁불퉁한 길에 흔들리면서 산 속으로 휘어진 길을 지난다. 그것이 바로 인생길이겠지.
서로를 다 알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책을 바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역지사지易地思之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보는 것일까.
왜 왔던 길을 되돌아갈까? 여행은 어차피 돌아오는 것이니까?
나의 이런 시 읽기는 완전히 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난센스일 수 있다. 마음대로 해석이 가능한 시, 이것이 또한 시 읽기의 재미가 아닌가.
-2021 다시올문학 겨울호 50